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근대 초기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가집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제1대종사 풍담(風潭)의심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의순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참고: 대흥사소개_대흥사(大興寺)> 

  1993년 7월경.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텐트랑 코펠든 베낭메고 3박4일 남도여행 하던 중 대흥사를 방문했다. 무위사(?)에서인가 답사기 책을 들고 다니시던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부인의 여동생이 대구교대 같은 학번이어서 차편을 도움받았는거 같다. 그분들은 당시 유선여관(지금은 찻집)에서 숙박을 하셔서 저녁 막걸리 생각에 야영지에서 밤길을 걸어 그곳에 다녀온 일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가는 길이 숲 터널이라 발끝이 안보일정도로  숲이 엄청났게 우거져던 기억이 새롭다.

 이번에는 무더위를 피해 차를 타고 절 주차장까지 들어갔기에 당시의 감흥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약 1km 걸어 올라갔다.      

절 초입엔 부도탑과 공적비가 많이 세워져 있는데, 이중에서 특히 초의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눈에 띄었다. 

유선카페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니 노린재나무(?) 향이 계곡에 가득했고, 박각시 나방 몇마리가 바쁘게 꿀빨고 있었다.

무염지에 다다르니 연꽃이 예뻐게 활짝 피어 있어  몇장 사진을 찍고...

 

이곳도 배롱나무가 많이 폈다. 올해 유달리 베롱나무가 더 붉게 느껴지는 것 불볕 더위 때문일까?

 

<대흥사 대응보전: 글씨는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길에 대흥사에 들렀다가 대응보전 현판을 초의선사에게 자신의 글로 바꿔라 했다가, 8년 3개월의 유배 후 돌아오는 길에 다시 원래대로 달았다는 이야기는 참 재미났다.  

<대흥사 대응보전 좌측 건물의 추사체의 무량수전 >
<일지암 >

<일지암 샘물: 물이 참 시원했다. >

 이 글을 쓰다 보니 옛날 자료가 생각나 찾아보았는데, 마침 1993년에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은 사진이 있어 디지털카메라로 다시 촬영해 보았다. 그 당시에는 초당 한 채만 있었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기와집 세 채가 들어서 예전의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일지암 대웅전에서 바라본 전망>

<오는 길에 잠시 들런 녹우당>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운주사

여행 2025. 8. 15. 16:57 Posted by 안경도

8월 13일 오후. 광주  출장길,
오전에 운주사 관람을 위해 대구에서 새벽 6시경에 출발. 9시경에 도착.

1993년 7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남도 답사를 왔을 때 처음 이곳을 찾았다. 언젠가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야 다시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당시 절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희미하지만, 기이한 형태의 석탑들과 석불, 그리고 와불의 모습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 시절엔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이 이상적인 탑의 형태라고 여겨졌기에, 운주사의 다층 석탑들은 다소 생경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불상 또한 석굴암의 부처님처럼 정제된 형상만 떠올리던 내게, 운주사의 불상은 마치 이름 모를 민중이 아무렇게나 다듬어낸 듯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하루 만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새 세상이 열린다는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인상이 훨씬 깊게 남았다. 고려시대 불상과 석탑의 특징이기도 한 이러한 형상들은, 내 젊은 날엔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던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운주사( 雲住寺 )는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배를 움직인다’는 뜻의 운주사(運舟寺)로 불리기도 한단다.
현재 돌부처 70구와 석탑 18기만이 남아 있으나, 조선 초기까지는 천 여 구의 불상과 탑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산과 들에 흩어져 있는 70여 구의 돌부처들은, 수 십 ㎝에서 10m 이상의 거대한 돌부처까지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평면적이면서 토속적인 생김새에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체 구조는 고려시대 지방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탑 또한 그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여, 3층·5층·7층 등 층수도 다양하다. 둥근 공모양의 원형탑이나 호떡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듯한 원판형탑 등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다. 또한 탑의 표면에 ‘X’, ‘◇’, ‘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 있어 특이하다.

운주사에는 누운 부처(와불)가 있어 유명하다.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룻밤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난 동자승이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불상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운주사는 특이한 돌부처와 석탑이 모두 한 절 안에 있다는 점에서 천불천탑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우리나라 미술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  참조( 사적 화순 운주사지 (和順 雲住寺址) | 국가유산포털 | 국가유산 검색)

<일주문 '영구산 운주사와 일주문 아래 거북상>

<일주문 지나면 바로 보이는 9층 석탑. 우측엔 석탑군이 보인다.>

<석불군 가 와 오층무소육탑>

<구층석탑의 탑신에 조각된 가하학적 문양>

<칠층석탑과 쌍교차문칠층석탑, 광배석불좌상>

영화 <외계+인1> 에 익숙한 촬영지가 보이는데 영화 보는 재미가   

<수직문 7층석탑아래의 석불군 다>

<수직문 7층석탑>

<수직문 7층석탑에서 바라본 칠성바위앞 칠성석탑 >

<광배석불좌상 쪽에서 바라본 쌍교차문칠층석탑, 칠층석탑, 구층석탑>

<석조불감과 칠층석탑>

<석조불감: 앞뒤로 두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원형다층석탑과 석조불감, 앞 석탑은 구성품을 모두 찾지 못해 이름이 없다.ㅠㅠ>

<보제루 앞에서 바라본 대웅전: 사천왕상 대신 금강역사(인왕상) 두분이 절을 지키고 있다..>

<대웅전과 다층석탑: 구성품을 다 찾지 못해서인지 다층탑으로 이름지어졌다.>

<미륵전 뒤에 위치한 마애여래좌상>

<마애여래좌상 앞 명당탑 >

폭우로 인한(?)길 공사로 와불이 위치한 건너편 탑들과 와불을 보질 못했다. 가장 아쉬운 건 와불을 못봤다는 것이다.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새세상이 온다는 전설보다 정채봉의 시 '엄마'가 있어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엄마             -정채봉

    꽃은 피었다
    말없이 지는데
    솔바람은 불었다가
    간간히 끊어지는데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
    겨드랑이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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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달다  -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시가 있어 더 행복한 여행이 되었다. 

병산의 여름

여행 2025. 8. 11. 06:44 Posted by 안경도

서울서 친구가 와서 여름 병산서원을 찾았다.

햇볕이 내리째는 여름엔 병산서원 나들이가 최고다.^^